'정순'은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조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삶과 사랑을 세심하게 표현했습니다. 한국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순왕후의 삶에서 권력의 희생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상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영조시대 - 왕비 책봉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759년 6월 9일, 김한구의 딸을 새 왕비로 중전간택하고 6월 22일에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습니다. 이 혼인은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으로, 영조는 66세이고 정순왕후는 15세였습니다. 그녀가 왕비로 책봉될 때 부모 내외뿐만 아니라 조부 김선경도 생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며느리인 혜경궁 홍 씨보다도 10살이나 어렸습니다.
간택 당시,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는 답을 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라고 답하여 영조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정순왕후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는 답변으로 영조를 감탄시켰습니다.
왕비 책봉 이후에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할 때, 정순왕후는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고 추상적으로 답하여 어린 나이에도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남편인 영조의 총애는 깊었지만 대군은커녕 공주도 소생하지 못하였으며, 임신했다는 기록도 없고 유산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정조시대
영조 후기에는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인 김귀주와 경주 김 씨 측, 그리고 혜경궁 홍 씨 친정인 풍산 홍 씨 측이 계속적인 대립을 보였습니다. 영조가 승하하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왕대비로 승격되었습니다.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청명당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으로 임명되고 홍인한과 정후겸의 탄핵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홍인한과 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이뤄지자,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흑산도로 귀양 보냈습니다. 김귀주는 1786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순조시대 - 수렴청정
1800년 8월 18일에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대왕대비로 승격되었으며, 왕실의 제일 큰 윗전으로서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정조가 죽은 다음날부터 언문교지를 내려 정사를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인사 조치를 중지하는 관례를 깨고 자신의 친인척과 노론 벽파 인사들로 조정을 채워 넣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였습니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는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정조가 내쳤던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또한,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을 영안부원군에 봉하고 관직을 제수하였습니다.
1801년 2월 22일에는 사학의 엄금을 하교하여 천주교를 박해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났는데, 이는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부정하는 것이며 남인과 시파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정순왕후의 정책으로 분석됩니다.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종과 이승훈이 처형되었고, 정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황사영에 의해 황사영 백서 사건이 벌어져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습니다.
■사망
신유박해를 통한 숙청작업 1년 만에 조정은 노론 벽파로 채워졌지만, 1803년에는 평양부와 함흥부에서 큰 불이 나고 사직악기고, 창덕궁 선정전, 인정전에서도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정순황후는 1804년 2월 9일에 수렴청정에서 물러났습니다.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그의 장인이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 관료가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의 정치를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바꾸었습니다. 결국 1805년 2월 11일에는 창덕궁 경복전에서 순조가 승하하였고, 영조와 함께 묻혀 있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전북은 연극의 도시로 '홍자연 작, 정순'을 통해 찬란한 역사를 되돌린다.
이 작품은 전북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대한민국 연극제의 대표 출전을 이루었는데, 이는 정순왕후의 당당한 캐릭터 표현과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강조한 결과이다.
●연출의도에 대한 인터뷰 중.
이 작품의 연출 의도는 최 씨가 최근 대선과 연계하여 권력의 본질과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살아있는 슬픔을 관객들과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하아트홀에서 시범 공연을 통해 한명희와 신숙주의 비중을 높이고, 연극인들이 함께 노력하여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를 희망한다.
●시사평 중에서.
2017년 전북연극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의 '정순'은 조선조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생애와 사랑을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세심하게 표현하여 호평을 받았다. 특히, 정순왕후의 일상적인 생활과 단종 서거 후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여성의 한을 물과 나무로 비유하여 상징성을 높였으며, 권력의 희생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정순의 인상적인 모습이 강조되었다.
한국사에서 바라 본 '정순'의 모습은 한 인간의 기구한 삶과 역사 속의 희생양인 듯합니다. 함께 살펴본 이 연극에서 여러분을 무엇을 느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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